애틀랜틱 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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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틀랜틱 레코드는 1947년 아흐메트 에르테군과 허브 에이브럼슨에 의해 설립된 미국의 음반사이다. R&B와 재즈 레이블로 시작하여 루스 브라운, 레이 찰스, 아레사 프랭클린 등 소울 음악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1960년대 후반부터 록 음악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레드 제플린, 크로스비, 스틸스 & 내쉬, AC/DC 등 유명 아티스트들을 배출했다. 1967년 워너 브라더스-세븐 아츠에 인수되었고, 현재는 워너 뮤직 그룹의 대표 레이블 중 하나이다. 1970년대에는 한국에 음반이 소개되어 팝, 록, 소울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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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틱 레코드 - [회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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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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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 | 1947년 10월 |
창립자 | 아흐메트 에르테군 허브 에이브럼슨 |
국가 | 미국 |
위치 | 뉴욕 시 |
웹사이트 | atlanticrecords.com |
모기업 | |
모기업 | 워너 뮤직 그룹 |
유통 | |
유통사 | 애틀랜틱 레코드 그룹 (미국) 워너 뮤직 그룹 (국제) 라이노 엔터테인먼트 (재발매) |
장르 | |
장르 | Various (다양함) |
2. 역사
애틀랜틱 레코드는 1947년 아흐메트 어티건과 허브 에이브럼슨에 의해 설립되었다.[96] 터키 외교관이자 주미 대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어티건은 어린 시절부터 흑인 음악과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캡 캘러웨이[97]와 듀크 엘링턴[98] 같은 거장들의 공연을 직접 접하며 음악적 소양을 키웠다. 당시 워싱턴 D.C.의 심한 인종 차별 분위기 속에서도 어티건 형제는 흑인 재즈 뮤지션들의 공연을 열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터키 대사관에서 듀크 엘링턴과 레스터 영의 콘서트를 성공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열정을 바탕으로 1947년 레이블을 창립했다. 이후 허브 에이브럼슨은 회사를 떠났고, 아흐메트 어티건의 형인 네스히 어티건과 빌보드 기자 출신인 제리 웩슬러[99]가 합류하여 레이블을 이끌었다.
초기 애틀랜틱은 R&B와 재즈 전문 레이블로 명성을 쌓았다. 루스 브라운은 레이블의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100] "루스가 지은 집"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라번 베이커, 바비 대린, 그리고 1952년부터 1959년까지 계약했던 레이 찰스 등이 초창기 레이블의 성장을 이끌었다. 특히 1950년대와 60년대 사우스 소울의 발전은 애틀랜틱 레코드와 제리 웩슬러, 톰 다우드와 같은 프로듀서들의 기여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1960년대는 격렬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민권 운동이 펼쳐지던 시기였다. 애틀랜틱 레코드는 이 시기 소울 뮤직의 황금기를 이끌며 시대정신을 반영했다. 멤피스의 스택스 레코드와의 성공적인 협력을 통해 오티스 레딩, 샘 & 데이브, 윌슨 피켓[102] 등의 음악을 선보였고, 특히 아레사 프랭클린[101]은 "Respect", "Chain of Fools"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소울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들의 음악은 주크 박스 등을 통해 널리 퍼져나가며 큰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애틀랜틱은 점차 록 음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블루 아이드 소울 그룹 라스칼스를 시작으로, 자회사 아토코 레코드를 통해 셰어, 버팔로 스프링필드, 아이언 버터플라이, 크림 등의 음반을 발매했다. 이후 영국 법인 설립 등 사업 확장을 통해 레드 제플린, 크로스비, 스틸스 & 내쉬와 같은 세계적인 록 밴드들을 배출하며 록 음악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7년 애틀랜틱 레코드는 워너 브라더스-세븐 아츠(현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에 인수되었으며, 이후 워너 뮤직 그룹의 핵심 레이블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2004년에는 일렉트라 레코드를 흡수 합병했다. 일본에서는 워너 뮤जिक 재팬이 음반 발매를 담당하고 있다.
연도 | 주요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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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 아흐메트 어티건과 허브 에이브럼슨이 뉴욕에 설립 |
1953 | 제리 웩슬러 입사 |
1955 | 로스앤젤레스의 스파크 레코드(Spark Records) 인수, 리버 & 스톨러 영입, Atco 레코드 창설, 네시 에르테군 입사 |
1961 | 멤피스의 스택스 레코드 미국 내 배급권 획득 |
1967 | 워너 브라더스-세븐 아츠 산하 편입 |
2004 | 워너 뮤직 그룹 내 조직 개편으로 일렉트라 레코드 흡수 |
2. 1. 설립과 초기 (1947-1950년대)
1944년, 네수히와 아흐메트 에르테군 형제는 터키 초대 주미 대사였던 아버지 무니르 에르테군이 사망한 후에도 미국에 남았다.[4]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형제는 15,000장이 넘는 78RPM 음반 컬렉션을 모았다.[4] 아흐메트는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음악을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워싱턴 D.C.에 머물렀으나, 실제로는 워싱턴의 음악계에 깊이 관여하며 음반 사업에 뛰어들 기회를 모색했다.[5] 그는 가족의 치과의사였던 바흐디 사비트에게 1만달러를 투자하도록 설득했고, 치과 대학생이던 허브 에이브람슨을 영입했다.에이브람슨은 이전에 내셔널 레코드에서 파트타임 A&R 매니저 겸 프로듀서로 일하며 빅 조 터너와 빌리 엑스타인 등을 발굴한 경험이 있었고, 1946년에는 주빌리 레코드를 공동 설립하기도 했다. 1947년 9월, 그는 주빌리 지분을 파트너 제리 블레인에게 매각하고 애틀랜틱에 2500USD를 투자했다.
애틀랜틱 레코드는 1947년 10월 공식적으로 법인화되었으며[96], 에이브람슨이 사장을, 에르테군이 A&R, 프로덕션, 홍보 담당 부사장을 맡았다. 에이브람슨의 아내 미리엄은 레이블의 출판사인 프로그레시브 뮤직(Progressive Music)을 운영하며 초기 사무 업무 대부분을 처리했다.[6] 당시 사무실 운영 자금이 부족하여 맨해튼의 리츠 호텔에 있던 사무실에서 제퍼슨 호텔의 방으로 옮겨야 했고,[9][10][11] 50년대 초에는 웨스트 54번가, 이후 웨스트 56번가로 여러 차례 이전했다.
애틀랜틱의 첫 번째 녹음은 1948년 1월 말에 발매되었으며, 타이니 그라임스의 "That Old Black Magic"과 조 모리스의 "The Spider" 등이 포함되었다.[12] 초기에는 현대 재즈에 집중했지만,[10][13][14] 일부 컨트리 웨스턴 및 스포큰 워드 녹음도 발매했다. 1948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제임스 페트릴로가 이끈 미국 음악가 연맹의 녹음 금지 조치는 신생 레이블이었던 애틀랜틱에게 큰 재정적 부담을 안겼으나, 금지 기간 동안 발매할 음반을 미리 충분히 제작하여 위기를 넘겼다.[13]
에르테군과 에이브람슨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재능 있는 인재를 찾기 위해 나이트클럽을 직접 돌아다녔다. 에르테군은 "A. 누게트르(A. Nugetre)"라는 가명으로 "Chains of Love"와 같은 곡을 직접 쓰기도 했다.[16] 초기 발매작에는 시드니 베체, 더 클로버스, 에롤 가너, 디지 길레스피, 프로페서 롱헤어, 빅 조 터너, 사라 본 등 재즈와 블루스 뮤지션들의 음악이 다수 포함되었다.[4]
1949년 초, 스틱 맥기(Stick McGhee)의 "Drinking Wine, Spo-Dee-O-Dee"를 재녹음하여 발매했는데,[4] 이 곡은 애틀랜틱의 첫 번째 히트곡이 되어 40만 장 가까이 팔리고 ''빌보드'' R&B 차트에서 2위를 기록하며 레이블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17] 같은 해, 방송인 윌리스 코노버의 추천으로 루스 브라운(Ruth Brown)을 발굴하여 계약했다. 그녀는 뉴욕으로 오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애틀랜틱은 9개월간 그녀를 지원했고, 이후 "So Long"(1949)을 시작으로 "Teardrops from My Eyes"(1951, 레이블 첫 밀리언셀러), "5-10-15 Hours"(1952), "Mama, He Treats Your Daughter Mean"(1953) 등 연속적인 히트를 기록했다.[19][21] 브라운의 성공은 애틀랜틱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레이블은 "루스가 지은 집(The House That Ruth Built)"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20][100]
조 모리스의 1950년 히트곡 "Anytime, Anyplace, Anywhere"는 애틀랜틱 최초로 45rpm 형식으로 발매된 음반이었다. 더 클로버스의 "Don't You Know I Love You"(에르테군 작곡)는 1951년 레이블 최초의 R&B 차트 1위 곡이 되었다.[21] 1952년에는 레이 찰스(Ray Charles)와 계약하여 "I Got a Woman", "What'd I Say", "Hallelujah I Love Her So" 등 이후 명곡으로 남을 곡들을 발표했다. 1953년에는 빌리 워드 앤 히스 도미노스를 나온 클라이드 맥파터(Clyde McPhatter)가 결성한 그룹 The Drifters와 계약했다. 그들의 싱글 "Money Honey"는 그해 가장 큰 R&B 히트곡이 되었으며[22], 후속곡 "Such A Night"과 "Honey Love"는 일부 지역 라디오에서 방송 금지를 당하기도 했으나[23] 모두 ''빌보드'' R&B 차트 1위에 올랐다.[19]
1953년, 빌보드 기자 출신인 제리 웩슬러가 파트너로 합류했다.[99] 그는 R&B와 소울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레이블의 음악적 방향 설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5년에는 아흐메트의 형인 네수히 에르테군이 합류하여[4] 주로 재즈 부문과 LP 음반 제작을 담당했다. 같은 해 로스앤젤레스의 스파크 레코드(Spark Records)를 인수하고, 리버 & 스톨러를 영입했으며, 산하 레이블인 Atco 레코드를 설립했다.
한편, 1955년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창립 멤버 허브 에이브람슨은 제리 웩슬러에게 사실상 파트너 자리를 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이브람슨은 웩슬러나 네수히 에르테군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고, 개인적인 문제까지 겹치면서[39] 결국 1958년 12월, 30만달러에 자신의 지분을 매각하고 회사를 떠났다. 그의 지분은 네수히 에르테군과 그의 전 부인이자 당시 프로그레시브 뮤직의 사장이었던 미리엄 비엔스톡(이후 미리엄 에이브럼슨)에게 분할되었다. 에이브람슨의 퇴사로 아흐메트 에르테군이 음반사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39][40]
2. 2. 소울 음악의 전성기 (1960년대)
1950년대 말, 애틀랜틱 레코드는 바비 대린과 레이 찰스라는 두 거물 아티스트를 연이어 잃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은 당시 레이블 매출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53][54]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애틀랜틱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고, 1960년대 소울 음악에서 그 답을 찾았다.1960년, 애틀랜틱의 멤피스 배급 담당자는 제리 웩슬러에게 카를라 토마스와 그녀의 아버지 루퍼스 토마스의 듀엣곡 "Cause I Love You"가 현지 소규모 레이블 새틀라이트(Satellite)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고 알렸다. 웩슬러는 새틀라이트의 공동 소유주 짐 스튜어트와 접촉하여, 1천달러와 소량의 로열티를 지불하고 해당 음반의 배급권을 확보했다.[56] 이 계약에는 향후 5년간 새틀라이트에서 나오는 모든 음반에 대한 우선권을 갖는다는 조건과 5천달러의 선지급금이 포함되었다. 이후 새틀라이트는 스튜어트와 그의 누나 에스텔 액스턴(Estelle Axton)의 이름을 따 스택스(Stax)로 사명을 변경했다.[57] 이 거래는 두 레이블 간의 성공적인 8년간의 협력 관계의 시작이었으며, 스택스는 애틀랜틱의 강력한 홍보 및 유통망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웩슬러는 "우리는 마스터 테이프 제작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 짐이 비용을 대고 완성된 테이프를 보내면, 우리는 그것을 발매했다. 우리의 비용은 프레싱, 유통, 홍보, 광고부터 시작되었다"고 회상했다.[58]
웩슬러는 스택스 스튜디오의 협력적인 분위기와 인종 통합적인 하우스 밴드(훗날 부커 T. & 더 M.G.'s로 알려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60] 그는 녹음 엔지니어 톰 다우드를 파견하여 스택스의 녹음 장비와 시설 개선을 지원했으며,[4] 애틀랜틱 소속 아티스트들을 멤피스로 데려가 스택스에서 녹음하기도 했다.[4] 또한 워싱턴 D.C.의 라디오 DJ였던 알 벨을 영입하여 스택스 음반의 홍보를 맡겼는데, 그는 레이블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파트너가 되었다.[58] 스택스와의 협력을 통해 애틀랜틱은 "Green Onions"(부커 T. & 더 M.G.'s), 오티스 레딩의 "Respect", 에디 플로이드의 "Knock on Wood", 샘 & 데이브의 "Hold On, I'm Comin'", 윌슨 피켓의 "Mustang Sally"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배출하며 멤피스 소울 사운드를 전 세계에 알렸다.
1961년 말, 가수 솔로몬 버크가 예고 없이 제리 웩슬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웩슬러는 버크의 팬이었고 그와 계약하고 싶어 했다. 버크가 전 소속사와의 계약이 만료되었다고 말하자 웩슬러는 "집에 온 걸 환영해. 오늘 계약하자"라고 답했다. 웩슬러가 버크와 함께 프로듀싱한 첫 번째 곡은 "Just Out of Reach"였으며, 1961년 9월에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이 소울/컨트리 & 웨스턴 크로스오버는 레이 찰스의 유사한 시도보다 6개월 이상 앞섰다. 버크는 196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1968년까지 애틀랜틱에서 히트곡을 냈다.
1966년, 아레사 프랭클린은 컬럼비아 레코드와의 계약이 만료된 후 애틀랜틱 레코드(Atlantic)와 계약을 맺었다. 컬럼비아는 그녀를 재즈 가수로 마케팅하려 했다. 제리 웩슬러는 "우리는 그녀를 다시 교회로 돌려보낼 것이다."라고 말했다.[19] 그녀는 빠르게 명성을 얻어 "소울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웩슬러는 앨라배마주 머슬 숄스의 페임 스튜디오에서 직접 프로듀싱을 맡았다. 그 결과 미국 팝과 소울 차트 모두 10위 안에 든 7개의 싱글이 연속으로 나왔다: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 (소울 1위, 팝 9위), "Respect" (소울 및 팝 1위), "Baby, I Love You" (소울 1위, 팝 4위),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소울 2위, 팝 8위), "Chain of Fools" (소울 1위, 팝 2위), "Since You've Been Gone" (소울 1위, 팝 5위), 그리고 "Think" (소울 1위, 팝 7위).[101]
이처럼 1960년대 애틀랜틱 레코드는 제리 웩슬러와 톰 다우드와 같은 유능한 제작진, 스택스 레코드와의 성공적인 파트너십, 그리고 아레사 프랭클린, 오티스 레딩, 솔로몬 버크, 윌슨 피켓 등 뛰어난 아티스트들의 활약을 통해 소울 음악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당시 격렬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민권 운동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애틀랜틱의 소울 음악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으며, 주크박스 등을 통해 널리 퍼져나가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0년대 중반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영향과 음악 시장의 변화에 따라 애틀랜틱은 영국 폴리도르 레코드와 새로운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1966). 이를 통해 크림과 같은 록 밴드의 음반을 자회사 아토코 레코드를 통해 발매하기 시작했다. 1967년 크림은 뉴욕의 애틀랜틱 스튜디오에서 톰 다우드와 함께 명반 ''Disraeli Gears''를 녹음했으며, 이 앨범은 미국과 영국 차트에서 모두 톱 5 LP가 되었고, 싱글 "Sunshine of Your Love"는 ''빌보드'' 핫 100에서 5위에 올랐다.[61] 이는 애틀랜틱이 소울 음악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점차 록 음악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2. 3. 록 음악으로의 확장 (1960년대 후반-1970년대)
1967년 10월, 애틀랜틱은 워너 브라더스-세븐 아츠에 1750만달러에 매각되었다. 초기에는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나 레프라이즈 레코드와 별개로 운영되었으나,[63][64] 이 매각은 스택스 레코드와의 유통 계약 재협상을 촉발했고, 스택스 녹음의 소유권 문제로 인해 1968년 5월 계약이 종료되었다.[65] 애틀랜틱은 1960년대에 유통했던 스택스 녹음의 권리를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인수 이후 제리 웩슬러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는 애틀랜틱이 백인 록 아티스트 중심으로 변화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1975년 회사를 떠났다.[66] 반면, 아흐메트 에르테군은 레이블 경영권을 확고히 하고, 이후 워너 뮤직 그룹 내에서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웩슬러의 제자였던 제리 L. 그린버그가 그의 뒤를 이어 애틀랜틱 레코드 사장이 되어 1970년대 레이블의 성공을 이끌었다.[73]
애틀랜틱은 록, 소울/록, 프로그레시브 록, 영국 밴드, 싱어송라이터 등으로 라인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새로운 자회사 레이블인 코틸리온 레코드(Cotillion Records)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블루스와 딥 사우스 소울을 위한 레이블로 시작했으나, 곧 프로그레시브 록, 포크 록, 가스펠, 재즈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코틸리온 소속 아티스트로는 임프레션스, 슬레이브, 브룩 벤튼, 진 나이트, 매스 프로덕션, 시스터 슬레지, 벨벳 언더그라운드, 에머슨, 레이크 & 파머 등이 있었다. 또한 루터 반드로스가 트리오 '루터'의 일원으로 녹음하며 경력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1969년 애틀랜틱의 주요 발매작에는 아레사 프랭클린, 레드 제플린, 돈 코베이, 보즈 스캑스, 로베르타 플랙, 윌슨 피켓, 모트 더 후플 등의 앨범이 포함되었다.[70]
1969년, 워너 브라더스-세븐 아츠는 키니 내셔널 컴퍼니에 인수되었고, 이후 워너 커뮤니케이션스(현 워너 뮤직 그룹)로 사명을 변경했다. 에르테군은 워너 내에서 애틀랜틱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71]
이 시기 애틀랜틱은 에르테군의 주도로 영국 출신 아티스트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1968년, 피터 그랜트가 가져온 영국 록 밴드 레드 제플린의 데뷔 앨범 테이프를 듣고 에르테군과 웩슬러는 계약을 결정했다.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추천도 영향을 미쳤다. 애틀랜틱은 밴드와 5년 전속 계약을 맺었고,[74] 이는 레이블 역사상 중요한 계약 중 하나가 되었다. 레드 제플린은 1973년까지 애틀랜틱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자체 레이블 스완 송을 설립하고 애틀랜틱과 유통 계약을 맺었다.
1969년에는 스티븐 스틸스, 데이비드 크로스비, 그래엄 내시로 구성된 슈퍼그룹 크로스비, 스틸스 & 내시와 계약했다. 스틸스는 버팔로 스프링필드 시절부터 애틀랜틱 소속이었고, 내시는 홀리스 멤버였으나 에픽 레코드와의 계약 문제가 있었다. 에르테군은 리치 퍼레이의 밴드 포코를 에픽 레코드로 보내는 대신 내시를 영입하는 협상을 성공시켰다.[4] 이들의 데뷔 앨범 ''Crosby, Stills & Nash'' (1969)는 큰 성공을 거두며 멀티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예스 역시 애틀랜틱을 통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71년 기타리스트 스티브 하우와 키보디스트 릭 웨이크먼이 합류한 후 발표한 ''The Yes Album'' (1971)은 영국과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발표한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1973)와 ''Going For The One'' (1977) 등은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며 1970년대 밴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70년대 후반 애틀랜틱의 록 음악 성공에는 A&R 매니저 존 칼로너의 역할이 컸다. 1974년 입사하여 1976년 서부 해안 A&R 이사가 된 그는 포리너, AC/DC, 피터 가브리엘, 필 콜린스 등 주요 아티스트들을 영입했다. 특히 영국과 미국의 멤버로 구성된 밴드 포리너는 여러 레이블에서 거절당했지만, 칼로너는 밴드의 가능성을 믿고 끈질기게 설득하여 계약을 성사시켰다.[76] 포리너의 데뷔 앨범 ''Foreigner'' (1977)와 싱글 "Feels Like the First Time"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애틀랜틱의 주요 수익원이 되었다.
1978년, 애틀랜틱은 마침내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제네시스를 미국 시장에서 성공시켰다. 에르테군은 밴드의 앨범 ''...And Then There Were Three...'' 작업에 직접 관여했으며, 싱글 "Follow You, Follow Me"는 밴드의 첫 미국 히트곡이 되었다.[77] 이는 드러머이자 보컬리스트인 필 콜린스와의 긴밀한 관계로 이어졌고, 에르테군은 이후 콜린스의 솔로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79]
1978년 2월 8일, 뉴저지주 롱브랜치에 위치한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애틀랜틱 레코드가 보관하던 테이프 보관소의 상당 부분이 소실되는 큰 손실을 입었다.[86][82][83] 이 화재로 1948년부터 1969년 사이에 녹음된 미발표 마스터 테이프, 대체 테이크, 리허설 테이프, 세션 멀티트랙 등 약 5,000~6,000개의 테이프 릴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발매된 앨범의 마스터 테이프는 뉴욕에 보관되어 있어 무사했지만, 초기 스테레오 녹음과 톰 다우드가 작업한 8트랙 멀티트랙 마스터 등 귀중한 자료들이 상당수 유실되었다.[86] 이후 일부 '분실'된 것으로 여겨졌던 테이프들이 재발견되기도 했는데, 존 콜트레인의 ''자이언트 스텝스'' 앨범 아웃테이크나 바비 대린의 "드림 러버" 데모 등이 포함된다.[86]
2. 4. 1980년대-현재
1988년 5월, 애틀랜틱 레코드는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개최했으며, 이 행사는 HBO를 통해 방송되었다. 약 13시간 동안 진행된 콘서트에는 레이블 소속의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참여했으며, 특히 레드 제플린과 크로스비, 스틸스 & 내시 (데이비드 크로스비가 출소 후 처음으로 가진 정식 밴드 공연)와 같은 록 음악계의 전설적인 그룹들이 재결합 무대를 선보여 주목받았다.[87]1980년대에 설립되었던 컨트리 음악 부서는 2001년에 폐지되었다.[88]
2003년 말, 타임 워너는 워너 뮤직 그룹을 투자자 그룹에게 26억달러에 매각했다. 이 거래는 2004년 초에 마무리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렉트라 레코드가 애틀랜틱 레코드에 흡수 통합되어 미국 동부 지역 운영을 위한 단일 레이블 체제가 되었다.[2]

2006년, 애틀랜틱 레코드는 제임스 블런트의 곡 "You're Beautiful"을 패러디한 위어드 알 얀코비치의 "You're Pitiful" 음원 발매를 거부했다. 이는 원곡 가수인 블런트가 패러디를 승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결정이었다. 애틀랜틱 측은 블런트의 경력이 아직 초기 단계이며, 그가 원 히트 원더로 남기를 원치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89] 얀코비치는 공정 사용 원칙에 따라 패러디를 발표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소속사였던 볼케이노 엔터테인먼트는 애틀랜틱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했다.[90] 결국 이 패러디 곡은 6월 7일에 온라인을 통해 무료로 공개되었다. 얀코비치는 이후 라이브 공연에서 "Atlantic Records sucks"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기도 했으며, 자신의 히트곡 "White & Nerdy"의 뮤직 비디오에서는 위키백과의 애틀랜틱 레코드 관련 문서를 편집하여 "YOU SUCK!"이라는 문구를 대문자로 표시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91]
2007년, 애틀랜틱 레코드는 창립 60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기념하여 PBS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American Masters''에서는 "Atlantic Records: The House that Ahmet Built" 편이 5월 2일에 방송되었으며, 동시에 스타벅스에서는 아흐메트 어티건이 직접 선정한 R&B 클래식 곡들을 모은 ''Atlantic 60th Anniversary: R&B Classics Chosen By Ahmet Ertegun'' 컴필레이션 CD가 발매되었다.[92] 같은 해, 애틀랜틱 레코드는 디지털 음원 판매(아이튠즈 다운로드, 휴대폰 벨소리 등)가 미국 내 전체 음악 판매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요한 이정표를 달성했다. 이는 당시 CD 판매 급감을 겪던 음반 업계의 다른 회사들과 비교했을 때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93]
2020년대 초반, 애틀랜틱 레코드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발맞춰 새로운 전략을 모색했다. 특히 틱톡과 같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부상하는 신인 아티스트 발굴에 주목했으며, 이를 통해 플라이아나 보스, 에플로(Efflo), 플로드 망고스(Flawed Mangoes) 등과 같은 새로운 음악가들과 계약을 체결했다.[94] 2024년에는 세계적인 걸그룹 블랙핑크의 멤버이자 뉴질랜드 출신의 한국 가수인 로제와 솔로 활동에 대한 계약을 맺으며 K팝 시장으로의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95]
3. 주요 아티스트
애틀랜틱 레코드와 계약하여 활동한 주요 아티스트는 다음과 같다.
- 켈라니
- 샤인다운
- 제이Z
- 루페 피아스코
- AC/DC
- 빅 컨트리 킹
- 프레디 킹
- 크레이그 데이비드
- 버디 가이
- 디디
- 미시 엘리엇
- 플로 라이다
- 고릴라 조
- 레드 제플린
- 메이스
- 제이슨 므라즈
- 네이트 도그
- 노터리어스 B.I.G.
- 숀 폴
- 심플 플랜
- T.I.
- 트위스타
- 트레이 송즈
- 위어드 알 얀코빅
- 영 드로
- 알리야
- 코디 심슨
- 에스텔
- 위즈 칼리파
- 벅체리
- B.o.B
- 브루노 마스
- 스크릴렉스
- 펜듈럼
- 스킬렛
- 포 논 블론즈
- 헌터 헤이스
- 크리스티나 페리
- 릴 우지 버트
- 콜드플레이
- 켈리 클락슨
- 로라 브래니건
- 제이슨 데룰로
- 로제
- 찰리 푸스
3. 1. R&B/소울
1949년 초, 스틱 맥기(Stick McGhee)의 "Drinking Wine, Spo-Dee-O-Dee"가 재녹음되어 발매[4]되면서 애틀랜틱의 첫 번째 히트곡이 되었다. 이 곡은 40만 장 이상 팔리며 ''빌보드'' R&B 차트에서 거의 6개월간 2위를 차지했다.[17] 같은 해, 방송인 윌리스 코노버(Willis Conover)의 추천으로 루스 브라운(Ruth Brown)이 애틀랜틱과 계약했다. 교통사고 후 애틀랜틱의 지원을 받으며 회복한 그녀의 첫 음반 "So Long"은 1949년 R&B 차트 6위에 올랐다.[19] 루스 브라운은 이후 80곡 이상을 녹음하며 레이블의 가장 중요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이 되었고, 그녀의 성공 덕분에 애틀랜틱은 "루스가 지은 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0] 그녀의 히트곡으로는 R&B 차트 1위를 기록한 "Teardrops from My Eyes"(1951년, 레이블 최초의 밀리언 셀러)[21], "5-10-15 Hours"(1952년), 그리고 "Mama, He Treats Your Daughter Mean"(1953년) 등이 있다.[4][19] 하지만 브라운은 1980년대 미지급 로열티 문제로 애틀랜틱을 고소했고, 결국 리듬 앤 블루스 재단(Rhythm and Blues Foundation) 설립으로 이어졌다.[21]조 모리스의 "Anytime, Anyplace, Anywhere"(1950년)와 The Clovers의 "Don't You Know I Love You"(1951년, 에르테군 작곡)는 레이블의 초기 R&B 히트곡이었다.[21] 1952년, 애틀랜틱은 레이 찰스(Ray Charles)와 계약하며 "I Got a Woman", "What'd I Say", "Hallelujah I Love Her So"와 같은 명곡들을 발표했다. 같은 해 말, The Clovers의 "One Mint Julep"은 차트 2위를 기록했다. 1953년에는 빌리 워드 앤 히스 도미노스(Billy Ward and His Dominoes)에서 나온 클라이드 맥패터(Clyde McPhatter)가 결성한 The Drifters와 계약했다. 그들의 데뷔 싱글 "Money Honey"는 그해 가장 큰 R&B 히트곡이 되었다.[22] 이후 "Such A Night"와 "Honey Love" 같은 곡들이 일부 지역에서 방송 금지되기도 했지만, 모두 R&B 차트 1위를 차지했다.[19][23]
녹음 엔지니어이자 프로듀서인 톰 다우드(Tom Dowd)는 애틀랜틱의 사운드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24][25] 애틀랜틱은 그의 주도로 스테레오 녹음[26]과 멀티트랙 레코딩을 미국에서 선도적으로 도입한 레이블 중 하나였다. 바비 대린의 "Splish Splash"는 8트랙 레코더로 녹음된 첫 곡으로 알려져 있다.[28]
1953년, ''빌보드'' 기자 출신인 제리 웩슬러가 부사장으로 합류했다.[31] 그는 "레이스 뮤직"이라는 용어 대신 "리듬 앤 블루스"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32] 웩슬러와 에르테군은 톰 다우드와 함께 수많은 R&B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당시 흑인 음악가들의 R&B 곡들이 백인 연주자들에 의해 커버되어 더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33] 예를 들어, 라번 베이커의 "트위들리 디"나 빅 조 터너의 "쉐이크, 래틀 앤 롤"은 R&B 차트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팝 차트에서는 백인 가수들의 커버 버전이 더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1954년 더 코즈의 "쉬-붐"이 팝 차트 5위에 오르면서 애틀랜틱은 첫 크로스오버 히트를 기록했다.[31] 애틀랜틱은 신선한 사운드와 높은 녹음 품질로 R&B 시장의 성장을 이끌었으며, 1950년대 내내 강력한 아티스트 라인업으로 R&B 차트를 지배했다.[26]
1960년대에 들어 애틀랜틱은 멤피스의 스택스 레코드(Stax Records)와 중요한 파트너십을 맺었다.[56] 칼라 토마스와 그녀의 아버지 루퍼스 토마스의 듀엣곡 "Cause I Love You"를 시작으로, 애틀랜틱은 스택스 음반의 유통과 홍보를 담당하며 8년간 성공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57] 이 파트너십을 통해 부커 T & 더 MGs("Green Onions"), 오티스 레딩("Respect"), 에디 플로이드("Knock on Wood"), 샘 앤 데이브("Hold On, I'm Comin'"), 윌슨 피켓("Mustang Sally") 등 많은 소울 명곡들이 탄생했다. 웩슬러는 스택스 스튜디오의 인종 통합적인 분위기와 하우스 밴드의 실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애틀랜틱 소속 아티스트들을 멤피스로 보내 녹음하기도 했다.[60][4]
1961년, 솔로몬 버크가 애틀랜틱과 계약하고 "Just Out of Reach"를 히트시키며 소울과 컨트리 음악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했다.
1966년에는 아레사 프랭클린이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애틀랜틱으로 이적했다. 제리 웩슬러는 그녀를 "다시 교회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하며[19] 앨라배마 머슬 숄스의 페임 스튜디오에서 직접 프로듀싱을 맡았다. 그 결과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 "Respect", "Baby, I Love You",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Chain of Fools", "Since You've Been Gone", "Think" 등 연속적인 히트 싱글을 탄생시키며 프랭클린은 명실상부한 "소울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외에도 애틀랜틱 레코드는 벤 E. 킹, 퍼시 슬레지, 클라렌스 카터, 아서 콘리, 카라 토마스, 조 텍스, 스피너스, 재키 무어, 스위트 인스피레이션스, 다니 해서웨이, 코스터스, 돈 코베이, 레버트, 자넬 모네, 에버리지 화이트 밴드, 시크, 앤 보그, 에스텔, 션 폴, 뮤직 소울차일드, 프리티 리키, 캐시, 셰리 데니스, 로버타 플랙, 디디, 미시 엘리엇, 릴 킴, 토니 브랙스톤, 올 포 원, T.I. 등 수많은 R&B 및 소울 아티스트들과 함께하며 장르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3. 2. 재즈
애틀랜틱 레코드는 초기에 R&B와 재즈 레이블로 유명해졌다. 창립자 아흐메트 에르테군은 소년 시절 캡 캘러웨이[97]와 듀크 엘링턴[98]의 콘서트를 접하며 재즈와 블루스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레이블의 음악적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96]1955년 1월, 아흐메트의 형인 네수히가 회사에 합류하여[26][35] A&R 부서 책임자[30]로서 레이블의 재즈 부서를 이끌었다. 그는 쇼티 로저스, 지미 지우프레, 허비 맨, 레 맥캔,[4] 찰스 밍거스, 존 콜트레인[36], 오넷 콜먼, 모던 재즈 콰르텟 (MJQ) 등 중요한 재즈 아티스트들을 영입하며 라인업을 구축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58년까지 애틀랜틱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독립 재즈 레이블로 성장했다.[26]
네수히는 LP 음반 제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6] 그는 1956년부터 기존의 10인치 앨범 시리즈를 정리하고, 12인치 LP의 '1200' 시리즈를 재즈 앨범 전용으로 지정하여 발매했다.[4] 또한, 조엘 돈은 휴버트 로의 재즈 앨범 ''The Laws of Jazz''를 성공적으로 프로듀싱한 이후 네수히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37][38]
3. 3. 록/팝
애틀랜틱 레코드는 초기에 R&B와 재즈 레이블로 명성을 얻었으나, 점차 록과 팝 분야로 영역을 확장했다. 자회사 레이블인 Atco를 통해 바비 대린과 같은 아티스트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43][44] 1960년대 후반부터는 백인 록 음악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블루 아이드 소울 그룹 영 래스컬스 (후에 래스컬스)를 애틀랜틱 레이블에서 직접 발매했다. 또한, 버팔로 스프링필드, 아이언 버터플라이 등을 Atco 레이블을 통해 선보였고, 크림의 음반을 미국 내에 배급했다.영업 방침 변경 이후에는 영국 록 밴드들과의 계약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8년, 피터 그랜트가 가져온 데뷔 앨범 테이프를 듣고 레드 제플린과 5년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레이블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계약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74], 레드 제플린은 1973년까지 애틀랜틱에서 활동한 후 자체 레이블 스완 송을 설립하고 애틀랜틱과 유통 계약을 맺었다.
1969년에는 아흐메트 어티건의 중재와 데이비드 게펜과의 협상을 통해 크로스비, 스틸스 & 내시 (CSN)와 계약했다.[4] 스티븐 스틸스 (전 버팔로 스프링필드), 데이비드 크로스비 (전 더 버즈), 그래엄 내시 (전 홀리스)로 구성된 이 슈퍼그룹의 데뷔 앨범 《Crosby, Stills & Nash》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멀티 플래티넘을 기록했고, 결국 ''롤링 스톤 선정 역대 최고의 앨범 500''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닐 영이 합류하여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 영 (CSNY)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예스 역시 애틀랜틱과 계약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비록 곡 길이가 길어 싱글 히트는 어려웠지만, 뛰어난 라이브 실력과 완성도 높은 앨범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1971년 발매된 《The Yes Album》을 시작으로 《Fragile》, 《Close to the Edge》 등 명반을 연이어 발표하며 1970년대 록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애틀랜틱은 또한 킹 크림슨, 에머슨, 레이크 & 파머와 같은 다른 주요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의 음반을 미국 내에 배급하기도 했다. 스웨덴의 팝 그룹 ABBA의 음반도 미국 내 배급을 담당했다.
1970년대 후반 애틀랜틱의 록 분야 성공에는 A&R 매니저 존 칼로너의 역할이 컸다. 그는 1976년 서부 해안 A&R 이사로 부임한 후, 다른 레이블에서 거절당했던 포리너를 적극적으로 영입했다.[76] 칼로너의 믿음 덕분에 포리너는 데뷔 싱글 "Feels Like The First Time"과 데뷔 앨범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애틀랜틱의 주요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 칼로너는 또한 호주의 하드 록 밴드 AC/DC를 비롯하여 피터 가브리엘, 필 콜린스 등 주요 아티스트 영입에도 기여했다.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제네시스는 1973년 애틀랜틱과 계약했지만 미국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가, 1978년 아흐메트 어티건이 직접 참여하여 리믹스한 싱글 "Follow You, Follow Me"가 히트하면서 미국 시장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77] 이후 제네시스의 드러머이자 보컬리스트인 필 콜린스는 어티건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어티건은 콜린스의 데모 테이프를 듣고 가능성을 보았으며, 데뷔 싱글 "In the Air Tonight"의 편곡에 직접 조언하기도 했다.[78][79] 콜린스는 애틀랜틱(미국) 및 버진 레코드(영국)와 계약하고 솔로 아티스트로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80] 한편, 제네시스의 원년 멤버였던 피터 가브리엘은 그룹 탈퇴 후 애틀랜틱과의 계약이 종료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게펜 레코드와 계약하고 《So》 앨범과 싱글 "Sledgehammer"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81]
1980년대에는 로라 브래니건, 줄리안 레논, 마릴린 마틴, 마이크 앤 더 메카닉스, 호주 밴드 INXS 등 다양한 팝/록 아티스트와 계약했다. 또한 하드 록 및 헤비 메탈 장르에서도 RATT, 트위스티드 시스터, 테스터먼트, 화이트 라이언, 미스터 빅, KIX, 윙거, 스키드 로우 등 여러 밴드를 배출했다. 1990년대에는 얼터너티브 록 밴드 멜빈스, 스톤 템플 파일럿츠, 콜렉티브 소울, 후티 앤 더 블로우피쉬, 매치박스 트웬티 등과 계약하며 시대 변화에 발맞춰 나갔다.
2000년대 이후에도 제임스 블런트, 주얼, 하드 파이 등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를 선보였으며, 코디 심슨, 찰리 푸스와 같은 젊은 팝 스타들을 발굴했다. 2024년에는 블랙핑크의 멤버인 로제와 솔로 활동 계약을 체결하며 K팝 아티스트와의 협력도 이어가고 있다.[95]
4. 한국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
일본에서는 1970년대부터 워너 브라더스 파이오니어(이후 워너 파이오니어)가 애틀랜틱 레코드의 음반 배급을 담당했다. 이 시기 워너 브라더스 파이오니어를 통해 발매된 애틀랜틱 레코드의 팝, 록, 소울 등 다양한 장르의 음반들이 한국에도 소개되면서 한국 대중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80년대에는 일본의 유명 헤비 메탈 밴드인 LOUDNESS와 X JAPAN 등이 애틀랜틱 레이블 소속으로 음반을 발매했는데, 이들의 음악은 당시 한국의 헤비 메탈 음악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5. 사회적 기여
애틀랜틱 레코드는 설립 초기부터 흑인 음악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운영되었다. 설립자 아흐메트 어티건은 터키 대사관에서 일하던 흑인 클레오 페인을 통해 흑인 음악과 문화를 접했으며, 캡 캘러웨이[97]와 듀크 엘링턴[98] 등의 공연을 직접 보며 흑인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96] 당시 워싱턴 D.C.는 인종 차별이 심각하여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였으나, 어티건 형제는 이러한 장벽에도 불구하고 터키 대사관에서 듀크 엘링턴과 레스터 영의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흑인 음악가들과의 연대를 시작했다.
1947년 레이블 설립 이후, 애틀랜틱 레코드는 R&B와 재즈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루스 브라운[100], 라번 베이커, 레이 찰스 등 재능 있는 흑인 아티스트들을 발굴하고 지원했다. 이는 당시 주류 음악계에서 소외되었던 흑인 음악가들에게 중요한 활동 기반을 제공하며 그들의 권익 신장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1950년대와 60년대 사우스 소울 음악의 발전은 애틀랜틱 레코드의 역할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1960년대는 미국 사회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민권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비록 법적으로는 시민권이 인정되었으나,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일상에서의 인종 분리는 여전히 존재하여 흑인과 백인이 출입하는 바가 분리되어 있을 정도였다.[96]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애틀랜틱 레코드는 아레사 프랭클린[101], 윌슨 피켓[102] 등 소울 뮤직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통해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의 음악은 주크 박스 등을 통해 흑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가며 큰 인기를 얻었고, 이는 단순한 음악적 성공을 넘어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과 공감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애틀랜틱 레코드는 흑인 음악에만 머무르지 않고 블루 아이드 소울 그룹인 라스칼스를 시작으로 셰어, 버팔로 스프링필드, 아이언 버터플라이, 크림, 레드 제플린, 크로스비, 스틸스 & 내쉬 등 백인 록 아티스트들과도 계약하며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혔다. 이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포용하며 미국 대중음악의 문화적 다양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6. 하위 레이블
- 애사일럼 레코드
- 앳코 레코드
- 빅 비트 레코드
- 커스터드 레코드
- 라살 레코드
- 마이바흐 뮤직 그룹
- 오슬라
- 업프론트 레코드
- X5 뮤직 그룹
- 테일러 갱 레코드
- 테러 스쿼드 프로덕션
- 제너레이션 나우
- 스위샤하우스
- 아트코 레코드
- 코틸리온 레코드
- 이스트 웨스트 레코드
- 143 레코드
- 스완송 레코드
- 배드 보이 레코드
- G-Recs
- 볼텍스 레코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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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さな願い]]」「[[リスペクト (オーティス・レディングの曲)|リスペクト]]」などソウルの名曲多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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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ン・ザ・ミッドナイト・アワー」「ダンス天国」などがヒッ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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